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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원들의 최후.

유창해 2024. 12. 31. 01:08

보통 한국의 언론들은 731부대가 도쿄재판에서 은폐되어 기소면제를 받아서 731부대원들이 심판을 받지 않은 걸로 잘못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 도쿄재판에서 기소면제받은 인원은 총사령관 이시이시로를 포함해서 최고위급 지도부로서 절반인 25명 밖에 되지 않는다

731부대 의사 나머지 절반인 25명(헌병대장들까지 포함)은 소련군과 중국공산당군에게 잡혀서 하바롭스크에서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벌판에서 6년 강제노동형, 푸순전범관리소에서 심문을 받으며 진술서를 작성하고 만주벌판의 푸순에서 6년에서 10년 노동교화제에 처해졌다. 당시 공산권의 추운지역 강제노동형과 노동교화제도는 사형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제발 역사를 왜곡하지 말고 제대로 알자! 도쿄재판에서 기소면제받은 숫자는 절반 밖에 안된다. 731부대원들은 분명 그만한 심판을 받았다. 잘알지도 못하는 언론과 작가들의 말이 더 큰 문제다...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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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제2차 세계 대전 후 1949년 12월 25일부터 30일에 걸쳐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의 장교 회관에서 일본군 전범 피고에 대해 6일간 열렸던 군사 재판이다. 일본인 피고들은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관동군 지도부와 생체실험 및 세균전 관계자들이었다.

주된 혐의는 1939년의 노몬한 사건, 소련에 대해 전쟁연습을 행한 1940년의 관동군의 특종연습, 731 부대100부대의 생체실험 등이다.

이 재판에서 야마다 오토조 관동군 사령관과 세균무기 제조와 생체실험을 행한 가지츠카 류지 군의중장, 다카하시 다카아쓰 수의중장, 가와시마 기요시 중장이 각각 25년 강제노동형을 받았고, 나머지 인물들도 2년에서 20년까지의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가벼운 형을 받은 사람은 기한이 되어 석방돼 일본으로 돌아왔고, 감옥에서 병사하거나 자살한 이를 제외한 이들은 1956년 소비에트 연방일본간의 국교 회복 후에는 감형으로 모두 일본에 되돌아왔다.

피고인과 판결[편집]

푸순전범관리소 징역.

중국공산당의 푸순전범관리소에서는 731부대 피고인들이 심문을 받으며 진술서를 작성하고 1950년에서 1956년까지 징역을 살았고 모두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에 처해졌다. 일부는 선양전범재판까지 받고 1959년까지 최대 10년 동안 노동교화했다.

피고인과 처벌.

사카키바라히데오(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이토(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하타마사유지(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야마시타노보루(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시노즈카요시오(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우에다미타(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사이토미오(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미야케슈야(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우츠키다케오(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요리후사토라오(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시무라유키오(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코바야시키이치(731부대 헌병대장). 푸순전범관리소 10년 노동교화제

유아사겐(731부대 의사). 푸순전범관리소 6년 노동교화제

-유창해-